헌책방 가는 길 일상

 나는 핑계가 필요했다. 수학도 작업도 정석이 있는 법이지만 둘 모두 서툴렀던 나는 다만 하루를 같이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 같이 영화나 한 편보다 덜 노골적이고 만나자 밥 사줄게보다 더 긴 시간을 약속해줄 수 있는 말이 간절했던 때, 그 시점에서 그 아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괜찮은 정보였다. 서울 놀러오면 연락해. 같이 헌책방이나 돌아다니자. 염불도 물론 좋지만 잿밥에 훨씬 더 비중을 둔 이 낚시에 다행히 그는 넘어가 주었고,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봄에 나는 나를 선배라 부르는 참한 부산 아가씨를 데리고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서울에는 생각보다 헌책방이 많다. 그리고 곳곳에 퍼져 있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처럼 한 곳에 모인 성지 같은 곳이 있다면 우리의 데이트는 짧게 끝났을 것이고 그는 나를 책 좋아하는 선배로 남겨두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처럼 밥만 많이 먹는 곰 취급은 당하지 않고 있겠지. 어쨌든 나는 심혈을 기울여 동선을 짰고, 처음 방문할 곳으로 홍대의 ‘숨어 있는 책’을 선정했다. 낭만적인 이름이 아닌가. 헌 책은 새 책과 다르다. 고객용 검색대에서 키보드 몇 번 두드리면 기다렸다는 듯 책이 꽂힌 위치와 그 위치로 가는 길까지 뱉어내는 서점들과 달리, 모든 헌 책은 ‘숨어’ 있다. 발견을 위한 노력 없이, 연륜처럼 쌓인 먼지를 뒤집어쓰며 다가갈 용기 없이 찾아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숨어 있는 책’은 헌책의 본질을 깨닫게 해 주는 이름이다.

 그렇게 멋대로 상상해버린 나는 진짜로 ‘숨어 있는’ 이 서점을 찾기 위해 다리품 꽤나 팔아야 했다.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 역에서 내려서, 홍대 쪽으로 일단 올라간다. 홍대 정문이 나오면 길 건너편에 삼겹살집이 늘어선 골목이 보이는데 그 골목으로 들어선다, 가다보면 철길이 나오는데(아마 지금은 없어졌을 듯) 그걸 건너 계속 가면 작은 슈퍼마켓 하나가 보이고,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조금 가다가 처음 나오는 점집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숨어 있는 책’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사실 가깝기로 치면 신촌역에서 더 가깝지만 거기서는 도대체 찾아가는 길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건물이 없다.)

 그러나 그 다리품이 아깝지 않은 곳, 서울 헌책방 중 단 한 곳을 가라면 바로 여기다. 후미진 만큼 조용하고 책방 안에 나지막이 흐르는 음악은 아늑한 분위기를 돋운다. 가격도 싸고 책 상태도 대체로 양호하다. 보유하고 있는 책도 많고 정리도 잘 되어 있다. 지상과 지하로 나뉘어 있는데, 인문사회 서적은 지하에서 팔고 문학은 지상에서 판다. 오후 한시인가 두시부턴가 문을 여니 일찍 가서 허탕 치지는 말자. 이 책 저 책 들추고 펼치고 빼었다 꽂았다하며 지상과 지하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메고 간 가방이 듬직하게 어깨를 누른다. 천천히 문을 열고 나와 온 길을 되걸어 용산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다음 목적지는 뿌리서점이다. 용산역 푸드코트에는 꽤 괜찮은 곳도 제법 있으니 저녁까지 해결 가능.

 용산역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오른쪽으로 간다. 달 주차장인가 해 주차장이었나. 하여튼 주차장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군대와 관련 있을 법한 건물이 하나 있고 그 건물을 스치듯 지나면 오른쪽으로 좁은 골목길이 보인다. 한밤중에는 주황색 가로등이 유행가 가사라도 한 줄 적을 수 있을 법한 분위기를 조성해준다. 그 골목길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조금만 가면 책 무더기가 보이고, 가까이 다가서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난다. 간판이 걸려 있다. ‘뿌리서점 - 책이 주인을 기다립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건 아닌지 미안할 만큼, 지하 서점은 책으로 가득하다. 대미궁 지하 그랑엘베르의 도서관이 아마도 이런 모습이겠지. 이미 책꽂이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정리를 바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서가는 이미 꽉 들어찼고, 서가들 사이는 수평으로 바닥부터 내 눈높이까지 쌓인 책들로 인해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뿐이다. 그래도 그때는 책을 ‘찾는다’는 행위가 가능지만, 책이 더 늘어난 지금은 정말로 답이 없다. 괜히 찾는 책 있나 본다고 뒤적거리다 행여 책더미를 넘어뜨려 거기에 깔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만큼, 책방이라기보다 책의 무덤에 가까워져 간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여기가 맘에 들었다. 교제하게 된 뒤로도 이곳을 많이 찾았는데, 책 상태는 솔직히 그리 좋지 않지만 그래도 이곳을 빼놓지 않은 현실적 까닭은 심각하게 낮은 가격이고, 감상적 까닭은 주인아저씨가 말없이 내미는 커피 한 잔에 매인 정이다. 계산대 그득 책을 쌓아두고 얼마인지 우리는 추측과 고민을 나누었고, 그의 유창한 부산 사투리를 들은 주인아저씨께서는 차비는 좀 빼준다며 (꽤 높은 숫자였던) 천원 단위를 쿨하게 툭 털어내셨다.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 이후에도 우리는 심심찮게 헌책방을 돌아다녔다. 사당역 ‘책창고’는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다. 헌책방 헌터들에게는 ‘교보문고’로도 불린다는 곳. 위치를 몇 번 옮겨서 인터넷에 나오는 정보 중에는 틀린 것도 꽤 되는데 현재는 확실히 사당역 근처에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쪽 출구로 나와 계속 걷는다. 미술관을 지나 TGI를 지나 아웃백도 지나면 꽤 큰 빵집이 있다. 그 빵집을 지나치지 말고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간다. 약간 오른쪽으로 굽어진 시장길을 걸어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족발집이 나오고(쟁반국수가 일품) 더 가면 ‘영화당 약국’이라는 간판이 있는데 그 간판 앞 오른쪽 길로 꺾어 들어가면 책창고 간판이 보인다. 책방은 건물 지하에 있다.

 헌책방이기도 하지만 재고서적도 파는 만큼 책 상태가 좋은 편이다. 가격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검색’이 가능하다는 점이 장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 종류별로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천천히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시집은 별로 없고 국내소설(특히 무협지와 판타지)의 비중이 높다. 역사 쪽 책도 제법 되고 가끔 보기 힘든 책이 등장하기도 한다. 함께 간 그는 이곳에서 ‘뿌리 깊은 나무’의 창간호를 구하기도 했다. (가격은 자비도 애정도 없이 자그마치 5만원) 시립미술관 분관에서 괜찮은 전시를 할 때마다 덤처럼 들를 만한 곳이다.

 책창고가 인터넷 검색과 예약이 된다지만, 인터넷으로 가장 유명한 헌책방은 신고로닷컴, 즉 신고서점이다. 지하철로 찾아가기엔 교통편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외대역에서 내려 외대쪽으로 올라가서 외대를 만나고, 오른쪽으로 좀 많이 걸어가면 나온다. 왼쪽(경희대 쪽)으로 가도 작은 헌책방들이 몇 곳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신고서점 한군데만 못하다. 규모는 지금까지 언급한 헌책방 중 가장 크고, 만화책도 많이 구할 수 있다. 1층과 2층을 오르내릴 수 있는 회전식 계단도 맘에 든다. 중세 영주의 성에 있는 도서관에 온 기분이랄까. 70~80년대를 뜨겁게 달군 운동 서적과 전공서적들을 많이 구할 수 있다. 책 상태도 깔끔한 편, 가격은 평범하다.

 퀴퀴한 냄새가 그득할 것 같은 이미지만 벗기고 보면, 데이트 장소로 헌책방은 꽤 괜찮은 곳이다. 조용하고 끝없이 이야깃거리가 있으며, 대화가 끊겨도 부자연스럽지 않은데다가, 문을 나설 땐 서로에게 작은 선물도 부담 없이 안겨 줄 수 있으니. 게으른 애인인 나는 데이트 코스를 짤 때 별 고민 없이 집어넣었고 그때마다 우리는 먼지투성이가 되어 즐거워했다.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와 책에 묻은 먼지를 털고 손때를 지워 나가면서 그렇게 사 모은 책들이, 그날의 추억을 조용히 소곤거리며 지금도 내 책꽂이에 자리 잡고 있다. 그 목소리가 들리면 아주 큰 배낭 하나 메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곳에 손잡고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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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이전에 썼던 다음 글을 대체합니다.
 : '헌책방 순례 - 사당역 책창고', '헌책방 순례 - 숨어있는 책, 뿌리서점'

 이 글은 군인트라넷 커뮤니티 '책마을'에 올렸던 글을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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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책방을 찾아서… 서울 용산 [뿌리서점] 2009/08/07 19:04 #

    용산 역 인근의 [뿌리서점]을 다녀왔습니다. ┗ 빨간색 느낌표가 있는 곳이 헌책방 [뿌리서점] 위치입니다. 용산역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가다보면 용사의 집이 보입니다. 그 용사의 집 왼편으로 난 골목길을 지나면 사공1길과 만나는데, 오른편에 한국여성단체협의회 건물이 있습니다. 헌책방 [뿌리서점]은 이 건물 오른쪽 귀퉁이 지하에 위치합니다. ┖ "용사의 집" 왼편으로 난 길고 좁은 골목길을 나와서 바로 오른쪽에 보이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건물 ┖ 그......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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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누에나방 2009/08/07 08:34 # 답글

    밸리에서 인기글이 되었네.
  • 펜큐어 2009/08/08 21:51 #

    그러게, 미처 몰랐다.
  • 가야 2009/08/07 09:26 # 답글

    핑백 덕분에 저도 헌책방 다시 돌아보게 되고, 홍대 근처 책방도 알았네요.
    고마워요. ^^
  • 펜큐어 2009/08/08 21:53 #

    숨책은 정말 괜찮은 곳이지요. :)
  • 냐옹냐옹 2009/08/07 16:59 # 삭제 답글

    추억 한 자락에 좋은 정보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

    어제 '업'을 보고 왔는데, 그래선지 펜큐어님 이야기가 더 기분 좋게 느껴지네요.
  • 펜큐어 2009/08/08 21:53 #

    뭘요. ^^; 방문 감사드립니다.
  • 끝소리 2009/08/13 21:31 # 답글

    안녕하세요. 제가 이글루스 돌림글을 받아서 그런데 여유가 되신다면 글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섯 개 질문 형식에 주제어를 대입해서 거기에 대한 글을 적는 형식입니다. http://iceager.egloos.com/1590471 참고하시고... 바쁘시지만 않고 마음에 내키신다면 '헌책방'에 대해 써주셨으면 합니다.
  • 펜큐어 2009/08/14 22:28 #

    예 ^^; 곧 써보겠습니다.
  • 2009/08/24 11:23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펜큐어 2009/08/24 11:50 #

    억울하다!
  • 2009/08/24 14:50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펜큐어 2009/08/27 23:23 #

    오타는 아니지만 고쳤어 -ㅅ-
  • 2009/09/02 11:19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펜큐어 2009/09/07 15:37 #

    아! 안녕하세요. 예찬님 글도 군생활의 좋은 벗이었습니다. :)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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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법 무효!